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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특별시

지역문화지수 평가에서 우수한 문화자원과 기반을 인정받은 도시 '창원'


부마민주항쟁 (1979.10.18.)

  • 주소마산합포구 월영동 429-42
  • 전화055-225-3631(자치행정과 민주성지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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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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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정부의 유신체제는 정치·사회적 갈등을 빚어오다가 1979년 한계에 이르렀다. 백두진(白斗鎭) 파동과 박정희 대통령 취임 반대운동 등 각종 시국사건에 대해 강압적으로 반정부 인사들을 연행·체포·연금·고문하였다. 같은 해 5월 3일 ‘민주회복’을 목표로 한 김영삼(金永三)이 신민당 총재로 당선되자 변칙으로 국회를 통과시켜 김영삼의 총재직 정지 가처분과 의원직 박탈 등 일련의 사건으로 유신체제에 대한 야당과 국민의 불만이 극에 달했다.

그리하여 10월 16일과 17일 부산에서 5,000여명의 대학생들이 ‘유신정권 물러가라“,”정치탄압 중지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주도하고 시민들이 합세하여 대규모 반정부시위를 일으켰다. 한편 18일과 19일에는 마산과 창원으로 시위가 확산되었다.

부마항쟁에 대해 박정희 정부는 처음에 대수롭게 않게 여기다가 사태가 심상치 않게 확대되어 나가자 10월 18일 부산일원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이틀 뒤인 10월 20일 마산 및 창원에 위수령을 발동하였다. 이로 인해 많은 이들이 연행되고 군사재판에 회부되었다.

계엄령과 위수령 발동 후 부마항쟁은 표면적으로는 단시간에 진압되었다. 그러나 10월 26일 부마사태의 수습책을 둘러싼 대통령 경호실장 차지철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격렬한 언쟁을 벌이고 도중 김재규는 차지철과 박정희를 권총으로 살해하여 박정희의 유신체제는 종말을 맞이했다.

시간별 재구성
1979년 10월 16일
- 부산에서 5천여명 대학생 시위 주도. 시민들이 합세한 대규모 반정부 시위 전개

1979년 10월 18일
- 마산, 창원지역으로 시위 확산. 정부는 부산지역에 비상계엄령 선포, 1천여명 연행, 66명 군사재판에 회부

1979년 10월 20일
- 마산, 창원 일대에 위수령 발동. 군사 출동하여 시위대 중 505명 연행, 59명 군사재판에 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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