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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5의거 (196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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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구간,길이,시간으로 구성된 표
기본정보 이승만 자유당 정부는 1960년 3월 15일 정·부통령선거에서 장기집권을 위해 선거준비 과정에서부터 노골적인 부정행위를 했는데, 이에 대구에서 학생들의 첫 시위(1960년2.28시위)가 터지게 된다. 그러다가 3월 15일 선거당일 3인조·5인조 투표장 투입, 4할 사전투표, 공무원 경찰 관권 동원, 부정선거 획책 등 공공연한 부정행위가 목격되자 마산시민은 ‘협잡선거 물리치자’는 구호를 외치며 항의 하기 시작했다.

경찰들이 최루탄 및 총기를 난사하여 많은 인명이 살상되고 27일 동안 실종 되었던 김주열의 시신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4월 11일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 떠오르자 김주열의 처참한 주검에 분노한 마산시민의 2차 시위(마산 4·11민주항쟁)와 함께 전 국민의 분노가 확산되어 4·19혁명의 기폭제가 되었다.

자유·민주·정의가 기본정신인 3·15의거는 현대사에 있어 찬란한 금자탑을 세운 민주 민권운동으로 우리나라 민주주의 역사 발전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하였다.

시간별 재구성
1960년 3월 15일
- 오전 10시 30분 : 민주당 마산시 당부 선거포기 선언
- 오전 10시 30분 ~ 오후 2시 : 부정선거 무효선언, 오동동 당사에서 가두 방송
- 오후 2시 30분 ~ 4시 30분 : 민주당 마산시당 간부 30여명 최초 시위, 600여명의 군중 시위 가세 불종거리에서 경찰과 대치, 투석전 전개 (민주당 간부 일부 강제 연행)
- 오후 6시 30분 : 마산 무학초등학교에서부터 도립마산병원에 이르는 연도에 수천명 시위 군중 운집. 경찰과 투석전 전개
- 오후 8시 10분 ~ 11시경 : 마산시청, 남성동파출소, 북마산 파출소 앞에서 시위군중을 향해 경찰 무차별 발포로 8명 사망. 부상자 수십명 발생 및 수백명 체포 구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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